설교문

로마서1-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롬1:1-7                    서영석목사 010-9074-0984)
󰁴 바울이 세 번째 전도 여행을 하던 AD 57년 경 고린도라는 도시에 잠깐 머물게 됩니다. 전도 여행을  멈추고 겨울을 고린도에서 보내면서 로마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서신을 기록하여 보내게 됩니다. 이는 직접 로마를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번번이 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소망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믿음을 굳게 세워주고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를 구축하여 세상 끝이라고 여겼던 서바나 오늘의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는 몸이 갈 수 없으니 편지라도 보내어 그들과 교제하며 사귀고 싶어서 기독교의 전통교리와 (1-11장)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를 (12-16장) 상세하게 서술하여 완성하고 겐그레아의 신실한 뵈뵈 집사님의 손에 들려 서신을 전달합니다. 로마서의 첫 장 첫 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매우 충격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말이냐?'고 반문하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둘로스” 단순한 종이 아니라 '노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노예가 없으니 노예가 얼마나 천한 신분인가를 실감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로마 인구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66만 이상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생산 수단이었지요. 그래서 “노예와 당나귀는 둘 다 똑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격적인 예우를 전혀 못 받았습니다. 당시의 노예 시장에 가면 반나체가 되어서 단 위에 전시되어 있는 경우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경 하다가 마음에 들면 흥정해서 사 갑니다. 집에 가서는 이미 뚫려 있는 귓불에다 주인이 자기 이름을 새긴 귀걸이를 달아 줍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노예는 귀걸이를 달아준 사람의 소유가 되어버립니다. 노예는 자기 재산이나 이름, 의지나 생각 꿈 계획이라는 것은 그림의 떡이요. 단순히 말할 줄 아는 짐승처럼 자나 깨나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만 하고 상전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 농사짓고 심부름하는 도구이었습니다. 

󰁴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이 한 번도 대면한 일이 없는 로마 교인들에게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로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예수의 노예로 소개하기를 더 자랑스러워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강요에 못 이겨 자기를 예수의 노예라고 불렀습니까? 물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강제적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가슴에는 무서운 증오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알고 있는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참람한 이단의 괴수로 그의 추종자들은 지구 끝에라도 쫓아가 말살해 버리려는 핍박자 훼방자 포행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를 만나 '너는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하자, 반항할 수도 없고 도망할 수도 없어 죽지 못해 끌려가는 노예와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서를 쓰던 당시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죽지 못해 끌려가는 종이 아니라 주인 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자원하는 종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 바울이 언제 그렇게 변했을까요? 성령이 새 마음을 주신 순간부터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를 종으로 누구에게 드리는 일은 절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결단하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계기가 생겨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당장 그러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처음엔 피할 수 없는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서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기까지 얼마 동안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이 확인하고 싶은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과연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선지자들의 글을 통하여 예언하셨던 메시아인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오경과 시편과 선지 서를 통해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확인해야할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얼마 후 성경을 가슴에 품고 아라비아 광야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3년 동안 은둔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검토하고 연구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분이 과연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아인지,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이 되시는 구원자인지를 철저히 검토했을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지, 이사야가 예언한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지를 밝히는 작업을 쉬지 않고 했을 것입니다. 
󰁴 드디어 그는 이사야가 예언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종' (사 61:1)이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의 종'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이 시편 16장에서 예언한 '썩음을 당치 않을 거룩한 자'가 바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사야 49장 6절에 등장하는 '땅 끝까지 구원을 베푸는 이방의 빛'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강제로 만나고 강제로 믿게 된 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약속하셨던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인류의 메시아요, 이 세계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이요, 구세주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를 말씀을 통해 다시 만났습니다. 감추어진 보화. 숨겨진 진주를 찾았습니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어 자신을 예수의 노예로 자원하여 드리기를 각오하고 결단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고 나서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기 전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사실이 가려져 있다가 죽음을 이기고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공공연히 온 세상에 확인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이 놀라운 진리를 찾아 한 걸음씩 발을 옮겨놓으면서  마음속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감격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가 얼마나 울었을까? 너무도 초라하고 힘없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분이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대망하던 메시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때 가슴이 벅차 얼마나 크게 외쳤을까? "예수를 없애야 해! 그를 추종하는 자는 한 놈도 남겨 두지 말고 씨를 말려야 해" 하며 이를 갈던 자신의 옛 모습을 돌아보면서 얼마나 흐느꼈을까? 자기를 불러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사도로 임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 앞에 너무 감격해서 목 놓아 울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알지 못하여 행한 것을 깊이 회개하고 탄식합니다. 이젠 억지가 아니라 자진해서 즐거운 마음 감격스러운 마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남은 생을 살기로 가슴속에 백 번 천 번 다짐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예수의 종이라 기쁘게 소개합니다. 자기는 없어지고 예수만 남은 자입니다. 

예수의 종으로 남은여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달픈지 잘 알았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혹독한 매를 많이 맞아야 하고 안방 드나들 듯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하며 저속한 모욕과 멸시를 당해야 할지 주께서 다 알려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여, 감사합니다. 가겠나이다." 고백하면서 천사와 사람들에게 조롱과 구경거리가 되면서 주를 위해 일사각오 정신으로 죽도록 충성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바울 사도가 종으로 일생을 산 것과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중 대부분은 바울처럼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억지로 믿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믿게 된 사람들은 대개가 믿고 싶어 믿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코가 끌려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처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교회 나온 사람이 많습니다. 바울처럼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하나님이요 구원자 되심을 철저히 확인하고 감격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송두리째 예수의 종으로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없어지고 주인 되신 예수의 종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뜨거운 가슴으로 달라진 신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세 가지는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마음의 왕좌에서 겸손하게 내려와 "나는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무엇인가 있다면 전부 주인 것이다.”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셋째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생존권의 포기입니다. 왜 주인 의식인 주권, 소유권, 생존권을 부정해야 합니까? 난 이제 예수의 것이요. 예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땅에 주인 잘못 만나 망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자신을 주인으로 여기고 살면 결국은 망합니다. 소망도 없이 블랙홀과 같은 허무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안심하고 우리의 일생을 맡길 수 있는 주인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전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 분을 나의 주 구세주로 모시면 참된 자유와 평안함이 있습니다. 능력이 따릅니다. 그리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2 - 나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

(롬1:8-17               서영석목사 010-9074-0984)
󰁴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복음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물론 복된 소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 중의 산 복음 핵심입니다. 산모가 밤중에 난산을 하고 있을 때 산부인과 의사가 오고 계신다. 산행을 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는데 구조 헬기가 오고 있다.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가장 기쁜 소식이요. 빅뉴스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계획을 누가 세웠습니까?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세전부터 계획을 세웠기에 하나님의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을 로마서 서두에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서에 제일 많이 사용된 단어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총 153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 66권 중 다른 성경 어디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높은 빈도입니다.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처럼 파격적으로 많이 사용된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 즉 복음이 하나님의 가슴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의도에서입니다. 복음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리게 됩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헤아려도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어리석고 욕심꾸러기 같은 나를 구원하려고 하셨는지! 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자기의 소중한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허락하셨는지!" 아무리 연구하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참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복음은 본래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 아닙니까? 복음을 전하자. 하면 당연히 불신자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복음이란 예수를 모르는 자에게 전하는 것인 만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인 당시 상황에서 굳이 예수를 알고 있는 자들에게 또 다시 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그처럼 간절히 원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흥미 있는 질문입니다. 먼저,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한번 살펴봅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즉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고 이미 구원받은 신자로서 성도라 불렸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았던지 온 사방에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좋고 신앙생활 잘 하는 교인들에게 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는지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얼마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는지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무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심정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한 번만 노력한 것이 아니라 기회만 있으면 로마교회에 가서 복음 전하려고 애를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로 달려가 복음을 전하고 싶어 애타게 소망하는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 사경회를 하거나 부흥회를 하여 무딘 마음의 연장을 갈 듯, 낡은 벽지에 새 벽지로 덧바르듯 첫 사랑 첫 믿음의 열정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다시 한 번 불일 듯 그 신앙을 일깨워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치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얼마나 무서운 충고입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드나들고 있지만 무엇인가 세속적이요. 세상에 치우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을 다시 듣고 은혜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힘을 잃어 가고 있는 이들에게 다시 한 번 복음을 생생하게 전하려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이 식어버리고 십자가의 피가 말라버렸으며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지만 복음의 메시지가 힘을 잃어버리면 영적으로 심각한 병에 걸린 증거입니다. 이 때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은 집 밖의 탕자가 아니라 집 안에 있는 장자 맏아들이요. 교회 밖보다 교회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다시 한 번 녹아져야 할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 앞에 단단하고 교만한 껍질이 부서지고 깨어져야 할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교회 안에 로마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 교회를 다녀도 복음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예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효력과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버리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하면, 눈을 반짝이며 설교자에게 집중하던 사람이 눈을 감아버립니다. 거부 반응이 심한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복음에 대해 의심하거나 곡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복음 이야기만 하면 교만한 태도를 드러내는 자들은 다 알고 있다는 식입니다. 십자가 설교만 하면 다 안다, 죄 용서받아야 된다는 말만 하면 다 안다, 마음을 굳게 닫고 자기 생각에 빠져버립니다. 큰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복음은 매일 새롭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 불감증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거 언젠가 들었던 설교인데 또 하는구나" 시큰둥하게 반응합니다. 교회 안에는 복음을 다시 들어 고질적인 병을 고쳐야 할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습니다. 목회적인 차원에서 볼 때 왜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로마교회에만 복음이 필요합니까? 복음은 오늘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복음을 다시 들어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이란 구원을 주신 주권자 하나님께 대한 감사요, 구원받은 자로서 기쁨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 구원받은 자로서의 기쁨, 이 감사와 기쁨을 한데 묶어서 우리는 구원의 감격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은혜를 체험했을 때 느끼는 신선한 감정과 흡사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난생처음 교회에 갔더니 이곳저곳에서 울며불며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는 장소인가?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지혜로운 분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는 원인은 나의 지은 원죄와 자범죄를 자복하며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울부짖음이요. 둘째는 먹빛 보다 더 검은 죄 주홍빛 보다 더 붉은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 것에 대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우는 것이라 설명해 주셨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20대 초반에 복음을 다시 듣고 체험한 구원의 감격에 대해서 "오! 죄의 무게가 사라지고, 수심에 잠긴 내 영혼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을 때 내 영혼이 얼마나 큰 기쁨으로 가득 찼던가! 그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이었다. 그날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날이었음에

󰁴 구원의 감격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은 복음을 다시 들을 때 우리 영혼의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수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예수 믿으면서 맛본 감격을 죽을 때까지 잃어버리지 않고 항상 유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요. 지혜롭고 현명하여 존경할 만한 멋쟁이입니다. 반면에 십중팔구는 구원의 감격을 오래 지속하지 못합니다. 한 2,3년 기뻐하고 좋아하다가, 어떤 사람은 겨우 한두 달 그렇게 감격해서 좋아하다가 맥없이 식어버립니다. 이것은 구원의 감격을 지속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말입니다. 산상 부흥회에 가서 큰 은혜를 받고 성령 충만하여 집에 돌아오면 현실이라는 육신적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육신은 어느덧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불가피한 영적 원리입니다. 첫째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면 감격을 알 수 없고, 둘째로 시간이 흐르면 식기 쉽고, 셋째로 죄를 범하든지 영적으로 병들면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에 해당됩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진지하게 반복해서 들으면 깨닫지 못하거나 식거나 깡그리 없어지는 병폐는 예방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 듣는다는 말도 되고, 배운다는 말도 되고, 깨닫는다는 말도 되고, 묵상한다는 말도 됩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가까이 모시고 그 분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셨는지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깊이 담고 묵상하는 삶을 사는 사람, 그리고 언제든지 예수님, 십자가, 구원, 죄 사함, 영생, 하나님나라와 같은 기본적인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귀가 번쩍번쩍 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일컬어 복음을 다시 듣는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복음을 자주 듣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 아는 것', '또 그 말' 하며 귀를 닫고 있습니까? 의심하던 사람이 믿음이 확고히 서면 구원받은 기쁨이 찾아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던 자가 진리를 깨닫고 믿음이 강해지면 기쁨이 찾아옵니다. 구원받은 감격이 마음속에서 새록새록 오늘도 치솟아 오르고 있습니까? 심령이 환하게 열리고 있습니까?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좋습니까? 목사는 교인들을 보면 감사하고, 교인들은 목사를 보면 기뻐합니까? 형제자매들이 은혜 가운데서 감격하는 모습을 보면 신선한 위로가 됩니까? 예수보다 더 좋은 것 없고, 구원받은 것보다 더 기쁜 것 없다는 고백이 있다면 오늘도 여전히 구원의 감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